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3학년 2학기에는 반에 사람이 많이 없었다. 대학에 진학하는 친구들은 학교에 남았고 취업을 목표로 한 친구들은 하나 둘 취업이 되며 학교를 떠난 것이었다.
나도 그중 하나로 개인 양식 레스토랑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며 프랑스 워킹홀리데이를 결심했다.
워홀 전에는 프랑스에서 돈을 많이 모아 오겠다는 포부가 있었다. (결국 적금을 다 깨고 돌아왔지만)
그래도 무시무시한 유럽 물가를 고려해 초반에 자리를 잡기 위한 비용을 넉넉히 모아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워홀을 결심 한 후부터는 쓰리잡을 하며 학원을 다녔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평일에는 *드포갈릭에서 9시~18시, 주말에는 카페에서 7시~15시, 남는 시간에는 베이비 시터 알바, 저녁 시간에는 프랑스어 학원을 다녔던 것 같다.
특히 양식 레스토랑에서는 1년 넘게 일하고 처음으로 퇴직금을 받았던 경험이기도 하다.
20살, 첫 주방일
조리과라고 하더라도 갓 졸업(도 못)한 고등학생을 정직원으로 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학교에서도 취업에 성공한 친구들은 환호와 응원을 받았는데, 나 역시 첫 취업이 쉽지는 않았다. 알바 경험이 많다고 해도 홀서빙 알바지 주방에서 직접 요리를 맡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처음으로 일하게 된 곳은 우연히 부모님 지인이 실장님으로 계신 개인 양식집이었다. 지인 찬스가 있었지만 나름대로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열심히 준비했다.
사장님은 연세가 좀 있으셨는데, 이탈리아에 다녀오시고 수년간 연구를 하여 요리와 가게에 자부심이 엄청 큰 분이셨다.
그래서인지 고등학생이라고 봐주는 것 없이 엄하게 일을 가르치시고 굴리셨다.
식당 일이라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주 6일을 일했는데, 먼 학교에 다니느라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던 나는 아침 9시에 일어나는 것이 꿈같고 정말 행복했었다.
그리고 3달 정도 일을 하며 느꼈던 것은 학교에서 3년간 배운 것보다 실무 3개월 하며 배운 것이 훨씬 많다는 점이었다.
사장님과 부모님 지인인 실장님께서는 억지 고집도 있으시고 구두쇠에, 소위 말해 꼰대 기질이 있던 분들이셨다. 두 분 외에도 나이 차이가 20살 가까이 나는 언니(?)도 계셨는데 알려준 적도 없는 일을 못한다고 따로 불러 소리 지르면서 화를 냈었다.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ㅠ_ㅠ (분조장에 조울증이신 것 같다. 기분 좋을 때는 웃으면서 막내야~하면서 심부름시키고, 기분 안 좋을 때는 가만히 있어도 화내면서 혼냈다.)
그 당시에는 힘들고 속상해서 집에 가는 길에 매일 울었다. 그래도 까다로운 윗 분들 덕분에 단기간동안 실력이 확 늘은 것 같아 지금 생각하면 감사하기도 하다.
에피소드가 정말 많은데 그중 정말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공휴일에 가게 문을 닫고 직원들이 모두 쉬기로 한 날이었는데, 사장님이 전날 밤인가 당일 아침에 연락하셔서 일당을 1.5배로 줄 테니 둘이 가게를 오픈하자는 제안이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했고 그날은 예상외로 평소보다 훨씬 바빴다.
혼자서 허겁지겁 재료를 손질하고, 샐러드/파스타 몇십 개를 만들고, 주문받고, 서빙하고, 계산도 하고, 자리를 치우고, 전화 응대를 했다. 너무 바쁘고 정신없어서 울뻔했는데 사장님은 여유롭고 느긋하게 피자만 구우셨다. 대부분의 손님들께서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다 드신 접시와 컵 등을 치우기 편하게 정리해 주고 가셨다.
그렇게 바쁜 줄 알았으면 시급의 3배를 줘도 안 했을 것이다. 손님들께 감사한 마음과 사장님에 대한 원망스러움 때문에 눈물이 났던 하루였다.
퇴사율이 매우 높아 일하는 동안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바뀌었는데, 다행히 좋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나마 또래였던 거의 10살 차이 언니 오빠는 엄청 다정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퇴근 후 셋이 맛집 탐방&맥주 한잔 하는 소소한 행복도 있었다. (안국 근처라 늦게까지 하는 예쁜 가게가 많았다.)
그리고 20살 차이 나는 새로 들어오신 남셰프님께서는 재료 손질 기본부터 꿀팁까지 자세하게 가르쳐주셨다. 왠지 모르게 다른 직원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던 분이었는데, 나는 감사하고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무래도 그 가게에는 어른들 사이의 정치질이 심했던 것 같다.
그만두게 된 계기
여느 때와 같이 출근 중이었는데 출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신호등 없는 도로를 건너다가 우회전하는 차량에 치여서 조금 날아간 것이다. 아프고 놀랐지만 가게의 가스라이팅에 당해있던 어린 나는 아픔보다도 출근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냥 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저씨께서 한사코 병원으로 데려가시며 부모님께 연락을 하셨다.
나는 그 상황에서도 어른들께 혼날 걱정만 머릿속에 가득 차있었다. 부모님은 당연히 놀라서 달려오셨고, 내가 혼날까 봐 너무 무섭다고 해서 부모님이 가게에 대신 연락을 해주셨다. 가게 어른들은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괜찮냐는 반응보다 회사에 미치는 손해배상 보험부터 알아보라고 하셨다.
다행히 치료도 잘 받고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뒤늦게 온 후유증에 열도 나면서 온몸이 뻐근하고 아팠는데 사장님께서 다음날 출근하라고 하셨다. 당시에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부모님께서 애가 차에 치였는데 그게 할 소리냐며 화를 내고 말리셨다. 그래도 다음날 출근을 했고,그분들은 너가 어제 갑자기 안 나오는 바람에 손해를 봤다며 걱정보다는 나를 나무랐다. 부모님은 무슨 그런 사람들이 다 있냐며 그런 곳은 당장 때려치우라고 하셨고 지인이던 실장님까지 손절하셨다.
그 일로 그곳은 관두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엄청 억울하다. 1년을 못 채워 퇴직금도 못 받고 교통사고 보상금도 50만 원밖에 못 받았다.
첫 퇴직금을 받았던 두 번째 주방일
화덕피자 가게를 그만두고 나서는 워킹홀리데이를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1년 동안 일과 병행해 프랑스어를 공부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이번에는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인 *드포갈릭에 면접을 보게 되었다. 다행히 여러 알바 경력과 주방 경력이 있어서인지 쉽게 붙을 수 있었다.
그곳도 마냥 좋기만 한 곳은 아니었지만, 시스템이 갖춰져 있고 불합리한 일을 많이 겪었어서 그런지 나에게는 천국이었다.
또래 언니오빠들도 많았고 제일 나이 많은 분이 30대일 정도로 평균 연령대가 낮은 편이라 이야기가 잘 통했다. 또 다른 시스템에서 새롭게 배운 것들도 많았다.
아침조라고 해서 나 혼자 제일 먼저 출근해 여러 가지 재료를 준비해 놓으면 이후에 출근한 사람들이 오픈 후 음식을 만드는 구조였다.
대형 레스토랑이다 보니 준비해야 하는 양이 어마어마했다. 가짓수의 경우, 매일 수십 개의 체크리스트 중 3분의 1에서 절반은 준비해야 했다. 또 양은 어찌나 많은지 예를 들면 엄청 큰 개수대가 꽉 찰 만큼의 홍합 손질, 10킬로의 마늘 슬라이스 튀기기, 내 몸만 한 토마토소스 끓이기 등이 있었는데 전 직장에서 셰프님께 재료손질 만큼은 마스터 수준으로 잘 배워뒀던 난 매니저님들께 항상 일을 잘한다며 칭찬받았다. (^^)
다만 마늘 튀기기나 토마토 소스 만들기는 너무 어렵고 싫었다. 5초라도 한눈을 팔면 시커멓게 타버리기 때문이었다. 2시간 동안 체크리스트를 모두 준비해야 하다 보니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시간 내에 할 수 있는데 계속 신경 쓰고 있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이 2개는 몇 번이나 혼났다ㅠㅠ)
아침 재료 준비를 마치고는 여유가 생겨, 설거지나 다른 직원들 어깨너머로 조금씩 요리를 배우거나 중간중간 재료 준비를 했다. 주방 일을 하며 무거운 것을 드는 일이 많아 힘이 세지고 전완근이 엄청 발달하게 되었다.
쉬는 시간에 직원들은 거의 잠을 잤는데 나는 빨리 밥을 먹고 프랑스어 공부를 했다. 어떻게 그렇게 성실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일도 재밌고 사람들도 좋다 보니 어느새 1년 넘게 일하게 되어 처음으로 퇴직금을 받았는데 정말 짜릿했다.
첫 카페 알바
처음으로 카페 일을 하게 된 곳은 서울 시청 쪽의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직장인이 많다 보니 새벽 6~7시에 출근해서 오픈을 했었는데, 작은 테이크아웃 전문점임에도 불구하고 피크시간대에 일하는 사람이 5명이었다. 한 명은 얼음만 푸고, 한 명은 샷만 내리고, 한명은 포장만 하고, 한명은 주문만 받고, 한명은 손님 픽업만 맡았다. 나는 카페 알바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샷 내리는 일은 어려울 것 같아서 부담됐고, 픽업은 손님을 불러야 하는데 목소리가 작아서 목이 너무 아파서 싫었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친해진 두 명이 있는데, 한 명은 동갑 친구고 한명은 9살 차이 언니였다.
동갑 친구랑은 이틀에 한 번씩은 밖에서 만날 정도로 친해졌고, 내가 프랑스 가기 전에 우정팔찌도 맞추고 장문 편지도 써주고, 아직까지도 가끔 연락하고 지낸다.
언니는 나이 차가 많이 나지만 엄청 동안인 데다가 성격도 나랑 잘 맞아서 나중에 같이 당일치기 여행까지 가게 됐다. 언니도 내가 프랑스 가기 전, 생각지도 못한 비싼 목걸이랑 10만 원짜리 잠옷을 선물해 줬다ㅠㅠ (잠옷은 5년째 잘 입고 있어서 입을 때마다 언니 생각이 난다) 그리고 TMI지만 일하면서 알게 된 손님이랑 결혼까지 하게 됐는데, 얼마 전에 지금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 놀러 와서 결혼하게 된 게 내 덕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초반에 연락하는 단계에서 나한테 고민상담을 했었는데 내가 긍정적으로 얘기해서 만나게 됐고, 내가 아니었으면 결혼 못했을 거라고.. 해서 너무 신기하고 감동이었다.
베이비시터 알바
나는 아기를 엄청 좋아하는데, 마침 잉여 시간에 할 수 있는 베이비시터 구인구직 앱이 내 알고리즘에 뜨게 되었다. 지인이나 사촌 중에서도 아기가 전혀 없고 베이비시터 경험도 당연히 없기 때문에 큰 기대 없이 이력서를 올려보았다. 그런데 한 아버님께서 나를 믿고 일을 맡겨주셨다. 지역도 가까워서 행복한 마음을 안고 댁으로 출근을 했다.
5살 여자 아이였는데, 말도 잘하고 활동적인 데다가 나를 잘 따라줘서 너무 귀여웠다. 손잡고 하원한 후에 집에서 놀아주기도 하고, 같이 쿠키 만들기도 하고, 스타필드 데이트를 하기도 하고, 인생네컷도 찍고, 카페에 가서 현지언니랑 셋이 놀아주기도 했다. (물론 허락받고!)
다행히 아버님께서도 나를 좋게 생각해 주시고 보너스를 주신 적도 있었다. 아기가 체력이 너무 좋아서 생각보다 힘들기도 했지만 정말 귀엽고 행복한 알바였다.
이 외에도 편의점 알바 등 중간중간 다른 알바를 하기도 했었다.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담배 이름을 다 외우게 됐다 ㅜㅜ
그리고 다른 알바들은 기억이 잘 안 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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