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워킹홀리데이 콘텐츠 공모전이 있다며 신청해 보라고 해서 공모전에 냈다가 떨어진 글이다😞
프랑스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오며 좌절했던 적도 많았지만 극복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내 인생이 달라지도록 도와준 7개월 간의 생각 변화, 여행과 일자리에 관한 에피소드 등 나의 성장과정이 담긴 글이다.
내 인생을 바꾼 워킹홀리데이
나는 스물한 살이다. 2019년 7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귀국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빵집 주인이 되기를 꿈꾸던 나는 특성화고등학교의 조리과에 들어가 제과제빵을 배우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과제빵으로 유명한 프랑스로 유학을 간다면 내 꿈에 더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제과제빵을 실제로 배우다 보니까 생각보다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유학의 꿈은 접어두고 조리 중에서도 양식 쪽으로 취업을 했다. 대학을 가지 않고 졸업 전에 바로 취업을 해서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이 즐겁게 캠퍼스 생활을 하는 것이 부러웠다.
요식업 특성상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생활이 지속되던 중, 문득 ‘일만 하며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세상 보는 눈을 키우고 나 자신에게 휴식 시간을 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본격적으로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내가 워킹홀리데이를 하기로 선택한 국가는 흔히들 가는 호주, 캐나다 등이 아니라 약간은 생소하기도 한 프랑스였다.
프랑스로 간다고 하니 주변에서는 “프랑스에도 워킹홀리데이가 있어?”라는 반응을 보였다.
내가 프랑스를 선택한 이유는 중학교 때부터 프랑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시시때때로 정보를 찾아봤기 때문이기도 하고, 호주같이 많은 사람이 가는 나라로 가면 한국인들만 만나게 될 것 같아 세상 보는 눈을 키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유럽을 간다는 것은 너무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겠다고 결심하니 제대로 준비해서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을 먹은 후부터는 일을 병행하면서 쉬는 시간에 짬짬이 프랑스어 공부를 했고, 퇴근 후에는 학원을 다니며 언어를 공부했다. 여행으로 간다면 상관없지만 1년간 살아야 하니 프랑스어를 아예 모르고 가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배우고 가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1년 동안 학원을 다니며 프랑스어 자격증 시험인 델프(DELF) 시험을 중급 수준의 B1까지 따고 항공권부터 예매를 했다. 항공권 예매를 하니 정말 간다는 것이 실감이 났고, 그 후로도 약 두 달간 더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으는 동시에 비자를 준비했다.
프랑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준비하며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보니까 언어 공부도 하지 않고 무작정 비자부터 발급받고 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만약 정말 급하게 준비하고 간다고 하면 3주 정도면 비자를 발급받아 갈 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넉넉했고 확실히 준비하고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학원도 다니며 비자 준비도 미리 해놓았다.
프랑스 워킹홀리데이는 1년에 선착순 2,000명이기는 한데 매년 미달이라 딱히 큰 문제만 없으면 거의 통과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원래 2018년 12월에 출발하려고 비자를 미리 받았는데 비자를 발급 받은 후 여권을 재발급받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여권을 재발급받았다. 그런데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일생에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이제껏 열심히 준비했는데 못 간다고 생각하니 좌절감이 밀려왔다. 재발급 사유서 등 서류를 제출하고, 다행히 이번만 봐준다고 하셔서 날짜를 한 달 뒤로 미루고 떠나게 되었다.
당시 내 계획은 가장 친한 친구와 같이 출발해서 열흘 정도 같이 여행을 하다가, 친구가 돌아가면 집을 구하고 계좌 개설 등 행정적인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 후에는 프랑스인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을 시작해 프랑스 현지생활을 체험하고, 휴일에는 파리 공원에서 여유를 즐기며, 근교 도시나 박물관 등을 방문하여 프랑스 생활을 마음껏 누리다가 한국 오기 한 달 전에는 유럽을 여행할 생각이었다.
친구와 같이 처음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이제부터 여기에서 살게 될 거라는 생각에 정말 설렜다. 박물관, 디즈니랜드, 에펠탑 등 유명한 관광지도 가보고 맛집과 카페도 많이 갔다. 주말에만 여는 벼룩시장에서는 프랑스의 빈티지스러운 골동품도 구경하고 특이한 디자인의 그릇도 샀다.
친구와 함께 즐겁게 여행하다보니 어느덧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친구를 공항에 데려다주고 혼자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서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가장 컸다. 한국에서도 부모님과 쭉 같이 살았는데, 첫 자취가 외국, 그것도 한국과 멀리 떨어진 프랑스라니 처음에는 불안한 마음뿐이었다.
집을 구하고 혼자 살아갈 준비를 하는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무엇보다 프랑스, 특히 인구가 밀집된 파리에서 외국인이 집을 구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프랑스에서 집을 구하려면 보증인이 필요한데 월세의 세 배가 넘는 월급을 받는 프랑스인이 보증을 해준다고 해야 집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워킹홀리데이를 오는 학생들에게 보증인이 있을 리가 없으니 집을 구하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 ‘프랑스존’이라는 한인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귀국하는 한국인이 집을 내놓으면 보증인 없이 집을 넘겨받는 방법을 이용한다. 그렇게 집을 구한다 해도 중개수수료를 한 달 치 월세(내가 살던 4~5평 원룸은 100만 원 정도였다)만큼 받는 곳이 대다수다. 더구나 괜찮은 집이 있으면 금방 나가버리기 때문에 집을 구하는 일부터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난 운 좋게 ‘프랑스존’을 통해 괜찮은 집을 계약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집을 구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가장 힘들었던 건 계좌를 개설하는 일이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이야 모바일 서비스가 발전해 어렵지 않지만 당시에는 서비스도 거의 없고 절차도 까다로웠다.) 워홀러가 계좌를 만들기 위해서는 월급을 받는다는 재직증명서가 필요한데, 일을 구하려 하니 은행 계좌가 있어야 일을 줄 수 있다고 하는 게 아닌가. 모순적인 상황이 황당하기도 했고, 한국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다고는 하지만 막상 혼자 행정업무를 처리하려고 하니 말문이 막히고 말이 너무 빨라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절망하던 중에 다른 사람들의 계좌 개설 후기를 보았는데, 프랑스는 지점이나 직원마다 일처리 방식이 달라 운이 좋으면 계좌를 개설해주기도 한다고 해서 다시 용기를 내어 은행을 여섯 군데 정도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으로 간 은행에서 친절한 직원을 만나 번역기를 돌려가며 결국 계좌를 개설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자신감이 조금 생겨 집에 있을 때는 독학으로 프랑스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지만 프랑스에서는 마음처럼 쉽게 풀리는 일이 없었다. 일을 구하려고 프랑스어로 작성한 이력서를 이메일로 몇 십 군데에 보냈지만 (과장없이 100곳 넘게 보냈다) 답장도 거의 없었고, 간혹 오더라도 부정적인 답변뿐이었다. 점점 초조해져서 직접 가게에 가서 이력서를 주고 온 적도 많았다. 하지만 여전히 무반응일 뿐이었다. 하기야 내가 사장이었어도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하지도 못하는 외국인보다는 말 잘하는 사람을 뽑았을 것이다.
초조한 마음으로 계속 구직활동만 하던 와중에 한국에 있는 친구 호정이가 휴학을 하고 프랑스로 두 달간 놀러 온다고 해서 월세를 반반씩 내며 지내기로 했다. 친구가 왔을 때는 같이 파리와 가까운 벨기에, 노르망디 해, 스트라스부르, 지베르니 정원 등 근교로 여행을 다녔다. 프랑스 시골은 분위기가 파리와 사뭇 다르다. 파리는 수도여서 사람이 많고 복잡한데 시골은 여유로웠다. 사람들도 여유롭고 파리보다 친절했다. 땅이 넓으니 집도 띄엄띄엄 있고 한적해서 같은 프랑스가 아닌 것 같았다. 특히 스트라스부르에서 기차를 조금 타고 콜마르에 갔는데 동화 속에 들어온 것만 같이 아름다웠다. 근교 여행을 하며 배운 것은 여유로운 삶이었다.
친구 덕분에 월세가 반으로 줄어든 두 달 동안은 한국에서 모아놨던 돈으로 여행비와 월세를 충당했다. 가끔 페이스북의 한인 커뮤니티를 보다가 발견한 것이 있었는데 유럽의 음식점, 박물관 등 정보를 블로그 리뷰 형식으로 한 개씩 쓸 때마다 2만 원을 받는 재택 아르바이트였다. 그래서 친구와 놀러 갈 때마다 사진을 찍고 집에 돌아오면 틈틈이 글을 작성하여 소소하게 돈을 벌었다.
그렇게 돈 될 거리를 찾다가 사업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커지게 되었다.
(이때 부업을 엄청 찾아보고 구매대행까지 할 뻔했다)
그때 친구와 함께 생각해낸 것이 있다.
프랑스로 여행 오는 사람들을 위해 돗자리, 바구니 등의 피크닉 세트를 빌려주고 간단한 음식과 음료를 준비해 주는 일이었다. 처음이니 작게 시작하려고 친구와 예쁜 돗자리와 소품들을 세 개 정도씩 사서 공원이나 강가 등에 세팅을 한 다음, 사진을 찍고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어 홍보를 했다.
물론 처음이라 팔로워도 100명 남짓했고 홍보도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빌려주며 사진을 찍고 홍보를 부탁했다. 처음에는 문의가 전혀 오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물어보는 사람이 하나둘 생겨났고, 이게 뭐냐고 먼저 말을 걸어오는 프랑스 사람들과는 같이 밥을 먹을 정도로 친해지기도 했다. 당연히 그 일만 하며 월세를 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으나 나에게는 첫 사업 아이템이기도 했으니 정말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인스타: @picnic_in_paris
근데 프랑스 번호 인증을 못해서 계정을 잃었다. 디엠도 20개 넘게 와있었는데 답장도 못하고 탈퇴도 못했다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난 후에는 비싼 월세를 감당하기 위해 일단 프랑스 현지 식당이 아니면 안 된다는 욕심을 접어두고 한인 식당에서 일을 시작했다. 프랑스는 대부분의 가게가 일찍 닫고 쉬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한국의 풀타임 개념이 아닌 3~4시간 파트타임으로 구인한다. 내가 일한 식당도 평일만 열었기 때문에 돈을 더 벌기 위해 다른 아르바이트를 찾아보다가 여성 전용 한인민박의 청소와 체크인을 도와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평일에는 식당에서, 일요일에는 한인민박에서 일을 하며 피크닉 세트 대여 문의가 들어올 때는 피크닉 사업을 했다.
한국에서 일을 할 때 사장 마인드로 일을 해야 같이 성장할 수 있다고 배웠던 나는 프랑스에서 일할 때도 내 가게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을 했다. 내가 일하던 식당의 사장님은 식당을 두 개 갖고 있었는데, 사업을 확장해 가게를 몇 개 더 열 예정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인력을 더 뽑아야 하지만 프랑스로 워킹홀리데이를 와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대다수는 학업을 병행하기 때문에 경험이 부족해서 일을 잘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하셨다. 나는 한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본 경험이 많아서인지 사장님이 일을 잘한다고 칭찬하신 적이 많았다.
그때 내 인생이 달라질 뻔한 순간이 있었다.
사장님께서 취업비자를 내줄 테니 프랑스에서 아예 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것이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민박집 사장님도 원래 매니저로 일을 하던 사람이 그만두었다고 하며 나에게 민박에 상주하며 매니저로 일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정말 흔치 않은 기회였다. 몇 주 동안 진지하게 고민했고, 어떻게 보면 해외 취업이라는 좋은 기회인만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해외에서 살려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고 취업 비자를 받는 것도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취업비자를 받아 한인식당에서 일을 하게 되면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해서 민박집 일까지 병행하기는 힘들었다. 식당에 정식으로 취업한다고 해도 프랑스의 비싼 월세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월급이 높지는 않아 월세를 내면서 저축하는 것도 힘들 것 같았다. 민박집 역시 한국에서 받는 월급보다 훨씬 적었다.
물론 돈만 생각하며 일하기보다는 돈을 적게 받더라도 내 나이에 남들이 하기 힘든 경험을 쌓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몇 달간 해외에 나가 혼자 살다보니 무척 지친 상태였다. 재정적인 부분도 그렇고 부모님과 한국 음식이 그리워서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다. 다행히 식당과 민박집 사장님 두 분 한국에 가서라도 생각이 바뀌면 말하라고 해주셨다.
한국에 오래 있다 보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이 만큼만 해도 프랑스에서의 경험이 부족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에서 일을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일을 한 기간은 두세 달가량이었는데 그동안 받은 월급을 계산해 보니 그때까지 냈던 월세에도 한없이 모자란 금액이었다. 결국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라도 워킹홀리데이 비자 최대기간인 1년을 다 채우진 못했지만 이쯤에서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에 간 지 6개월 정도 됐을 때였다.
그러고는 남은 기간 동안 일을 하고 집, 계좌, 인터넷, 전기 등의 계약을 해지한 후에 한 달 정도 유럽여행을 하려고 준비했다. 하지만 계약을 해지하는 것은 처음에 계약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계약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해지하는 절차도 복잡했고 오히려 돈도 많이 들었다. 프랑스에서 살면서 프랑스어를 많이 듣고 사용하다 보니 듣는 것은 웬만큼 알아들을 수 있었고 어느 정도 의사소통도 가능할 정도로 언어실력이 많이 늘었다. 그러나 혼자 프랑스인과 전화로 계약을 해지할 만큼 유창하지는 못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집 계약 해지는 어찌어찌했는데 나머지는 해지를 못 해서 집 계약이 끝나는 날 예약했던 오후 비행기를 못 탈 뻔하기도 했다.
‘프랑스존’을 찾아보니 다행히 행정업무를 도와주시는 분이 계셔서 돈을 내고 도움을 받았다. 친해진 옆집 프랑스 아저씨에게 해지해야 할 인터넷 기기를 맡기고, 행정업무를 도와주시는 분이 받아 대신 처리를 해주셔서 돈이 많이 들기는 했지만 무사히 해지를 했다. 그때는 정말 눈앞이 깜깜했다. 그냥 도망쳐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프랑스에서 에피소드가 정말 많다.
그중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몇 가지 있는데, 그날은 아직까지도 내 생에 최악의 날로 기억된다.
프랑스에서는 도어락이 없어 집 문을 열쇠로 열어야 하는데, 하루는 퇴근 후 열쇠를 잃어버려 집에 들어갈 방법이 없어서 당황하고 있던 와중에 핸드폰까지 날치기를 당했다. 저녁 10시 즈음 핸드폰을 보며 걸어가고 있는데, 날강도가 뒤에서 핸드폰을 낚아챈 것이다. 놀라서 뒤를 돌아봤더니 슬로모션처럼 3초간 눈이 마주치고 씩 웃으면서 도망치길래 쫓아갔는데 이미 골목으로 사라진 후였다. 뒤에 계시던 프랑스인 할아버지께서 영문도 모르고 같이 뛰어주셨지만 너무 빨라서 잡을 수 없었다.
울면서 집 앞에 앉아 있다가 다음 날 출근을 해야 해서 잠부터 자야겠다는 생각에 호스텔에 갔다. 그런데 숙박을 위해서는 여권이 필요한데 여권도 집에 있었다. 그때는 정말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 생각도, 프랑스어도 생각이 안났다. 울면서 직원에게 영어와 프랑스어를 섞어가며 사정을 했더니 숙박을 허락해줬다. 핸드폰이 없어 알람도 못 맞추고 씻지도 않은 채로 선잠을 자다가 아침 일찍 집 경비실에 가니 다행히 여분의 열쇠가 하나 있었다. 집에 돌아가서 씻고 출근부터 한 후, 같이 일하는 동료의 도움을 받아 핸드폰 공기계를 중고로 사고 그 사건은 마무리됐다.
또 하나는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노트르담 성당의 화재 장면을 바로 그 앞에서 보았던 것이다. 불과 몇 시간 전 근처에서 사진을 찍고 산책을 하는데 연기가 나고 있던 것이다. 외국인인 나도 그렇게 놀랐는데 프랑스 국민들은 훨씬 더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우는 사람도 있었고 기자도 정말 많았다. 외국인은 한국인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재난 앞에서의 사람 마음은 다 똑같구나,라고 생각했다.
재밌었던 일도 많았다. 유네스코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한국인 언니를 만난 적이 있다. 언니와 친해져서 유네스코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게 되었다. 유네스코 구내식당은 고층에 있어서 에펠탑이 아주 잘 보였는데 거기에서 밥을 먹은 경험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또 유럽에는 한국의 공유자전거 ‘따릉이’처럼 길거리마다 ‘Lime’이라는 전동 킥보드가 있는데 대여가 간편해서 매일 자가용처럼 타고 다녔다. 한 달 치 끊어놓은 교통권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파리에는 짧게 여행 오면 관광지만 보느라 보지 못할 골목길이 정말 많다. 여유롭게 걸어 다니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예쁜 가게들과 골목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비가 오는 파리는 정말 아름답다. 파리는 비가 자주 오는데 부슬부슬하게 내리다가 갑자기 멈추거나 다시 느닷없이 내려서 프랑스 사람들은 우산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진정한 파리지엔느처럼 우산을 버리고 비를 맞고 다녔다.
한국인들은 이웃과 인사를 잘 안 하는 사람이 많지만 프랑스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어도 웃으면서 인사하고 말을 걸어서 나중에는 내가 먼저 인사를 하게 되었다. 파리 생활을 통해 받은 긍정적인 영향이 무척 크다.
프랑스에서 귀국 준비를 다 마친 후에는 이비자, 모로코, 베니스, 부다페스트, 프라하, 코펜하겐, 스톡홀름, 헬싱키, 스위스, 니스(프랑스 남부 지역) 코스로 유럽을 여행했다. 나는 유럽 여행을 지금 나이 때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고, 20대 중후반에나 돈을 모아 겨우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워킹홀리데이를 한 덕분에 내 버킷리스트를 조금 더 일찍 이룰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워킹홀리데이와 여행 덕분에 내 인생 행로가 완전히 달라졌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 마지막 여행 코스였던 니스에서 우연히 어떤 한국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람과의 인연 덕분에 지금 나는 한국에서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웹기획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있고, 프랑스에서 혼자 살던 경험을 되살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살고 있다. 또 원래도 겁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유럽 생활을 통해 막연해 보이는 일들도 막상 하고 나면 별 거 아니라는 자신감이 커진 것 같다.
비록 처음에 생각했던 1년이란 기간을 못 채우고 중도에 귀국하긴 했지만, 워킹홀리데이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겁 없이 미지의 세계로 무작정 도전했던 일은 앞으로도 내 인생에 커다란 자양분이 될 거라고 믿는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꿈을 꾸고 성장하며 도전할 것이다. 나는 인생의 새벽에 서 있고 실패의 경험마저도 내게는 큰 자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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